<한국의 103위 성인- 김 루치아 (金 Lucy)> 6
성녀 김 루치아(金, Lucia)는 서울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불구였기 때문에 교우들 사이에 보통 ‘꼽추 루치아’로 통하였다. 그녀가 언제 어떻게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어렸을 때부터 교우였다고 하니 집안도 어느 정도 천주교와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장성한 뒤에는 교우가 아닌 어느 외교인에게 출가하게 되었다. 외교인 남편과 가족들은 그녀가 다른 교우들과 상종하는 것을 막고, 교우의 본분을 지키는 것도 방해하였다. 이 때문에 성녀 김 루치아는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서 남편의 집을 나와 여러 교우들의 집으로 피해 다녔다. 교우들은 성녀 김 루치아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 주었다. 그녀는 교우들의 집안일을 도와주고 아이들과 병자와 허약한 이를 돌보며 자신이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자기의 열성으로 사람들을 감화시켜 모든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
그녀는 배운 것이 없어 세속적으로는 무지한 부인이었지만 천주를 전심으로 사랑하고 영혼 구하기에 열중하여 여러 외교인을 입교시키기도 하였다. 그녀가 지닌 신앙의 논리는 상식적이고 그 대답 또한 풍요로웠다. 한 번은 어떤 외교인 양반이 “지옥이 그렇게 좁다고 하니 어떻게 사람을 그리 많이 집어넣을 수 있을꼬?” 하며 빈정댔다. 그러자 성녀 김 루치아는 “당신의 그 작은 마음이 비록 만 권의 서적을 품고 있어도 그것 때문에 좁다고 생각하신 적은 한 번도 없지요?”라고 반문하였다. 이 말을 들은 그 양반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천주교인들은 무식한 사람도 모두 조리 있는 말을 한단 말이야!” 하며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성녀 김 루치아는 기해년(1839년) 4월 중순에 붙잡혀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옥중에서도 그녀는 병자를 도와주며, 얼마 안 되는 자기 돈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며 애덕을 실천하였다. 포장이 다른 교우들의 이름과 주소를 대라고 하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마음이 없고 죽기로 작정하였노라고 말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 성녀 김 루치아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태형 30대를 맞았는데, 매가 그녀의 마른 몸에 닿자 마치 뼈를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 형벌을 받은 후 옥에 들어오자마자 기진하여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함께 갇혀 있던 여교우들의 간호를 받으면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그해 9월 어느 날 71살의 나이로 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녀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명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김 루치아의 축일은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에 함께 경축하고 있다.♧